581
수수모가 익어가는
가을 하늘 아래, 지난 밤 달빛이 뿌려 놓고 간
메밀꽃 사이로,
말방울 소리 흔들며 흐르던 오솔길은
어제 같지 않지만,
가슴으로 읽어 내는 먼 풍경 속으로
곧은 길을 돌아서
먼 우회로(迂回路)를 따라가던, 그를
우리는 지금도 잊지못하노니......
582
바람 부는
로비에 서서, 손녀와 나는
저 달을 보고 있었다.
그 옆으론
초저녁 별이 떠서, 우리를 더 넓고 깊은
그 분의 품으로 인도하듯이,
그렇게, 우리를 불러 주셨다.
저, 오묘하고
신비한 빛은 급기야 우리 안에서
강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.
강물은
범람할 줄 모르는 그 빛을
사모햐였기에.......
583
바닷바람에
슬린 해송(海松) 한 그루, 온 바다들
홀로 거느리고,
바다가 토해 낸 새벽 하늘을
품에 안고 섰다.
태양은 진주처럼 빛을 발하며
외마디 함성으로 세상을 깨우고 있다.
꿈꾸는
바다여........
584
구름이
흘러가고, 구름이 다시
몰려 오는곳,
그 곳에 옥정호가 있다.
모든
사물에는 뿌리가 있고
우리들의 삶에는
본향이 있다기에, 오늘도
우리는
옥정호를 내려다 보며
설레이는 마음으로, 먼 하늘 빛을
우러러 보고 있는 것이다.
585
빈 목벤치에
누군가
홀로 앉아서, 그토록 오랜 세월
채워지지 않는
한 점 고뇌는, 지는 낙엽으로도
다 할 수 없는
위대한 선언이었음을
이 가을은 말해 주려는가.........
587
하늘을
닮은 이들만이 하늘을
볼 수 있으리라.
구름처럼
흰 꽃잎처럼
하늘을 누비듯이 살아가는
이들만이, 하늘은
한 없는 축복으로
우리에게 내리심을을 아시나니.........
588
이 존엄한 사실은
우리가
광야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.
그 길은
상식에 의존하는 이들에게는
지극히 불행한 길이었다.
왜냐하면,
그 길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열린 길이기에,
상식에 의존하는 자마다
실패를 맛보는 길이었다.
지금 우리는
그 길을 가고 있다.
상식이 지배하는 우리의 인생길이, 왜 점점
한계에 부딪쳐 오는가를
깨닫는 이마다 얻으리니, 우리가 잃어버린
그 길을......
589
댓돌 위에
놓인 한 켤레 검정고무신, 물드는 가을 하늘 아래에서
누군가를 홀로 기다리고 있다.
인기척이 없는 고독속에서 만나고 싶은 그는 누구인가,
가을이 깊어 오는 이 길목에서.......
590
밤하늘의 별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
소고(小鼓)고를 치며 원무로 내닫던 여자 아이들의
발자국 소리 들린다.
밤하늘의 별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
늙으신 어머니를 등에 엎고 피접가던 젊은 아들의
숨결에 찬 그 발자국 소리 들린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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